경주 하루 코스로 둘러보기

우리가 이번 생을 단 한번 밖에 살 수 없는 것처럼, 선택을 해야 만 할 때가 있습니다.

경주를 하루만에 둘러보기는 어렵습니다. 단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면 어디를 가야 할까요?

경주를 대표하는 3곳(동궁과 월지, 국립경주박물관, 경주대릉원)을 추천합니다.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는 경주시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 궁궐 유적이다. 신라의 별궁으로, 신라의 태자가 사는 곳이었다. 왕이 사는 법궁인 경주 월성과는 북동쪽으로 접해 있으나 현재는 원화로에 의해 갈라져 있다. 또한 이곳의 심벌은 월지라는 이름의 인공 호수인데, 사실 궁궐의 이미지보다는 과거 통칭이었던 '안압지'라는, 월지 호수와 누각으로서 훨씬 잘 알려져 있다. 이 인공 호수는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 구역으로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 만든 곳이다.

동궁과 월지 안내간판(주차장에 위치)

 

'안압지'라는 말이 기성세대에게는 친숙한데 그 이유를 확인해보니 유쾌하지 않습니다.

안압지는 한자어로 기러기 안, 오리 압, 연못 지를 쓰는데 조선시대에 오리 기러기가 놀고 있는 연못이어서 안압지라고 했다니 참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우리 것의 역사를 보는 안목이 참 낮았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오리 기러기떼 노는 연못 보다는 동궁과 월지가 적절하다는 생각입니다.

 
동궁과 월지

 

월지

 

옛 건물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기단

 

월지와 건물의 조화

등궁과 월지 유적의 연못 서편과 남편에서 총 31동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서편 건물 터는 연못 기슭의 석축과 맞닿도록 조성된 제1~5 건물 터. 그리고 익랑과 회랑으로 둘러싸인 A~C 건물 터로 이루어져 있다.

제1~5 건물 터는 기단이 남아 있어 건물 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5동의 건물 터 중 제1.3.5 건물 터가 복원되었다.

동궁과 월지 유적 내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A~C 건물 터는 남-북을 중심축으로 하여 차례대로 배치되었으며, 익랑과 회랑이 주변을 감싸고 있다.

*익랑: 좌우 양편에 날개처럼 펼쳐진 집채

*회랑: 주된 집채의 좌우에 있는 긴 집채

* 기단: 건축물을 올려놓기 위해 흙이나 돌을 쌓아 주변 지역보다 높게 조성한 단

연못
수조유구 설명

수조는 화강석으로 만들었으며, 수로의 입구에 놓여 있는데 40cm 높이의 차이를 두고 2개가 연결되어 있다. 반월형으로 안쪽을 깎아 내어 물을 고이게 하였고, 가장자리에는 용 모양을 조각한 흔적이 있다. 수조 좌우에는 큰 널돌을 놓고 벽석을 세워 공간을 마련하였다. <규모〉 수조 길이 2.5m, 너비 6m

흐르는 물이 모여 폭포를 이루고 이 물이 연못으로 흐르도록 구성하여 다양한 변화를 동궁과 월지의 주요 경관을 구성하였다.

*유구 : 인간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파괴되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 없는 잔존물이다. 대지 위에 구축한 것으로 과거 인간들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물길
월지에서 보는 달은 몇 개일까요?
정원수의 모양이 경이롭다

 

건물의 외관을 따라 직선을 봅니다.

 

건물 지붕의 뽀족한 점과 추녀의 곡선 그리고 인공적인 직선을 따라 시선을 두다
안내판

동궁과 월지에 대한 설명.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년)에 큰 연 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 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율 만들었 다.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으며, 문무왕 19 년(679)에는 동궁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 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는데, 신라 경순왕이 견원의 침입 을 받은 뒤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 도 하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지만, 조선시대 「동국여지승 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동 궁과 월지(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월지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 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서쪽 못가에 있는 신라시대의 5 개 건물터 중 3곳과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박가 에는 '조로 2년(품표로 그#,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 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 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 데, 이것은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에 위치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의 문화유산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박물관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60여년의 전통을 지닌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어린이박물관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을 출발점으로 신라 천년의 역사문화와 만나는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랍니다.

신종

부모의 아동 살해는 어떻게 '효'문화와 연결되어 있는가? 생명에 대한 생각

어린이들과 학생들은 신종을 만드는 설명에서 유아 살해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20분 간격으로 (녹음된)종 소리를 들려줍니다.
뭘 간절히 기원하는 것인지? 나는 어떤 기원을 할 것인지?
연표는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숫자
구석기 시대는 현재 우리 인간의 몸을 만든 장구한 시간

 

구석기 시대는 현재 우리 인간의 몸을 만든 장구한 시간

 

구석기 시대는 현재 우리 인간의 몸을 만든 장구한 시간

 

당시 사람들은 유리 그릇을 어떠게 바라봤을까?
역사시험의 단골 주제...... 왕권강화
피라미드를 만든 이유와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역사책에서 보던 그 사진
 

경주대릉원

경주 시내를 멀리서 바라볼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들 사이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고분들이다. 지금부터 천년도 더 넘는 시절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터전이 한데 어울려 있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비감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능의 곡선을 바라봅니다.
돌을 쌓은 모습
하늘을 향하는 무덤과 지하를 향하는 물
부장품과 잔인한 순장문화를 생각해 봅니다.

 

말다래
인근 카페

대릉원 정문 인근 커피점

황남동 포석로 일대의 "황남 큰길" 이라 불리드 전통한옥 스타일의 카페나 식당, 사진관등이 밀집된 젊은이들의 많이 찾는 곳이다. 황남동과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합쳐진 단어로 "황리단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황리단길은 낡은 건물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거리이다.

 

기타

석빙고 (보물 제66호)

석빙고는 얼음을 넣어두던 창고로, 경주 월성 안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 게 자리하고 있다. 남쪽에 마련된 출입구를 들어가면 계단을 통하여 밑으 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경사를 지어 물이 흘러 배수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은 반원형이며 3곳에 환기통을 마련하여 바 깥 공기와 통하게 하였다. 석비에는 조선 영조 14년(1738년) 부윤 조명겸이 나무로 된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석빙고 입구의 이맛돌에는 3년 뒤인 조선 영조 17년(1741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고쳐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규모나 기법면에서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월성 (사적 제16호)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있었던 도성이다. 성의 모양이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반월성 • 신월성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성이라 하여 재성(135))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파사왕 22년(101년)에 성을 쌓고 금성에서 이곳으 로 도성을 옮겼다고 전해진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동궁과 월지 • 임해전 • 첨성대 일대가 편입되어 성의 규모가 확장 되었다. 성의 동• 서 • 북쪽은 흙과 돌로 쌓았으며, 남쪽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 밑으로는 물이 흐르도록 인공적으로 마련한 방어시설인 해자가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경주 동궁과 월지로 통했던 문터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