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작성하는 피의자신문조서

2022년 1월 1일부터는 피고인이 형사재판에서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사실과 다르게 말했다”고 한마디 하면 검사가 수사단계에서 애써 조사한 수백 쪽 분량의 피의자 신문 조서(피신조서)는 두꺼운 이면지로 전락하게 된다.
  피고인이 법정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증거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판사가 피신조서를 임의로 받아 읽어볼 수도 없다. 지난해 2월 4일 개정돼 2022년부터 시행되는 형사소송법 312조 1항에 따라서다.

 

1. 현재는 '검사가 피고인이 된 피의자의 진술을 기재한 조서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피고인이 진술한 내용과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음이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피고인의 진술에 의하여 인정되고, 그 조서에 기재된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졌음이 증명된 때에 한하여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어 피고인이 법정에서 부인하더라도 '특신상태' 등이 인정되면 검사 작성 피신조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2. 하지만 2022년 적용 개정 형사소송법은 이 조항을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서 공판준비, 공판기일에 그 피의자였던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그 내용을 인정할 때에 한정하여 증거로 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바꿨다.

 

3. 앞서 2020년 2월 개정 때 형소법 312조 2항 영상 녹화된 피신조서의 증거 인정 조항은 통째로 삭제됐다. 피고인이 검사가 작성한 조서 내용을 부인할 때에도 영상녹화물이나 그 밖의 객관적 방법으로 피고인 진술 내용과 동일하다고 증명될 경우 증거로 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선 코앞으로 다가온 내년(2022년) 벽두부터 형사재판 법정 현장의 혼선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1954년 형소법 제정 이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지는 셈이어서다.

 

형사소송법 제312조

 

4. 과거 형사소송법 제정 배경. 수사기관의 조서가 재판에서 증거로 쓰이게 되면 수사기관이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 등 강압적인 수사를 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당시는 일제 고문 경찰의 폐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던 해방 직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피고인이 공판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증거가 될 수 없도록 설계됐다. 문제는 검사가 작성한 조서에도 증거력을 주지 않을지였다.
   이와 관련, 한국 형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엄상섭 의원은 1954년 2월 16일 국회 회의에서 “검찰이나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은 피고인이나 변호인 측에서 이의가 없는 한에서만 유죄의 증빙 재료로 할 수 있도록 하면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의미에선 대단히 좋다”면서도 “비교적 경찰보다 인적요소가 조금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검찰이 작성한 조서에까지 증빙력을 주지 않는다면 소송이 지연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검찰은 그대로 두는 것으로 절충이 됐다”고 설명했다.

 

5. (검사측 우려)차장검사 출신인 권오성 변호사(법무법인 삼우)는 “물적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술 증거가 보완돼야 유의미한 증거가 되는 게 허다하다”며 “피신조서의 증거능력을 날리는 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유·무죄의 선택을 피의자가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권 변호사는 이어 “더 큰 문제는 검사가 소극적으로 기소할 것이란 우려”라며 “피의자가 검사 앞에선 자백해도 법원에 가면 무죄가 나올지 모르는데 누가 모험적으로 기소하겠느냐. 결국 피해자만 억울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검사 출신 배지훈 변호사(법무법인 화우)는 “검찰에서 한 진술을 증거로 쓸 수 없는 상황이면 재판이 애초 기소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비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6.(변호사측 반론), 변호사 사이에선 “재판이 길어질 우려는 있지만 억울한 피고인의 이익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변화”(한 대형 로펌 변호사)란 평가가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 김태규 변호사는 “실체적 진실 발견에 너무 집착하면 형사 절차가 굉장히 잘못될 수 있다”며 “실제 재판이란 건 실체적 진실 발견뿐만 아니라 공정한 절차적 권리 보장, 인권 보장의 기능도 있는 것인 만큼 판사에겐 부담이더라도 피고인의 증거 활용 측면에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부장판사 출신 황정근 변호사(법무법인 소백)도 “공개된 장소에서 하는 진술과 밀실에서 하는 진술은 완전히 다르다. 검찰 조서는 굉장한 압박을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이기 때문에 왜곡되기 쉽다”며 “공판중심주의가 기본이란 점에서 올바른 방향”이라고 평가했다.

 

7.(평가)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법무정책연구실장은 “공범 진술의 증거 능력을 제한해서 실체적 진실 발견을 제한할 수 있다는 지적은 기본적으로 검찰이 여태껏 증거에 기반한 수사를 하지 않고 자백이나 진술에 따른 조서에 의존하는 수사를 해 왔기 때문”이라며 “조서라는 건 일방이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다원적 대화를 전제로 하는 공판에선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실이 이상을 따라가는 게 맞지, 현실에 맞춰 이상을 낮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8.(검찰의 대응방안) 대검찰청(총장 김오수)은 2021년 12월 30일 "피신조서 증거능력이 제한됨에 따라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 증거 사용이 어렵게 돼 재판이 장기화되는 등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런 상황과 관련해 자체 검토와 일선 검찰청 건의 등을 기초로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일선청에 배포했다"고 밝혔다. 

  배포된 매뉴얼은 △개정 형사법령에 따른 검사 조사 방식 다양화 매뉴얼(형사부) △검사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 증거능력 제한에 따른 공판대응 매뉴얼 △영상녹화조사 수사·공판 활용 사례(과학수사부) 등이다.

 

주요 내용을 보면 우선 수사 단계에서는 기존처럼 피신조서를 사건 유형, 조사 목적 등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계속 작성해 활용하도록 했다. 다만 피고인이 법정에서 조서 내용을 부인해 증거능력이 부정될 경우를 대비해 영상녹화 조사를 적극 실시하고 공소제기 또는 1회 공판기일 전에 공범 등의 주요 진술에 대한 증거보전청구와 증인신문청구 등을 활용하라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공판단계에서는 수사 중 피의자 진술을 청취한 조사자나 참여자를 증인으로 신문하는 조사자증언을 적극 실시하라고 했다. 또 조사자증언의 신빙성을 증명하고 피고인이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는 경우 이를 탄핵하는 등의 용도로 피신조서와 영상녹화물을 활용할 것을 당부했다.

 
아울러 피고인의 진술번복 여부, 법정태도 등을 구형에 적극적으로 반영토록 했다.

한편 대검은 수사기관 조사 과정에서 생성된 영상녹화물이 법정에서 독립된 증거로 쓰일 수 있도록 하는 등 형사소송법 개정 노력도 병행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