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6‧25참전유공자의 공헌을 기리고, 자유의 소중함을 알려 국민들의 안보 의식을 높이기 위해「6‧25전쟁 제73주년 행사」를 25일(일)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제73주년 행사는 생존 6·25참전유공자들에게 정부가 정전 70주년 계기로 추진한 <영웅의 제복>을 참석자 전원이 입고 거행되는 첫 정부기념행사이다.
행사는 참전국기 입장, 국민의례, 기념공연(1), 제복전수식, 정부포상, 기념사, 기념공연(2), 6‧25노래 제창 순으로 50분간 진행된다.
사회자의 개식 선언에 따라 22개 유엔참전국 국기와 태극기, 유엔기가 입장하면 국민의례가 진행된다. 국기에 대한 경례 맹세문은 2023년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6‧25참전유공자 남명식님과 아들 남덕우님, 손자 남상혁님 3대가 함께 낭독한다.
* 국기에 대한 맹세문 낭독 : 2023년 병역명문가 · (6·25참전유공자-남명식, ‘32년생) ’50.9월 참전, ‘55.8월 전역, 의정부 전투 등 · (6·25참전유공자 장남-남덕우, ’59년생) 육군병 복무만료 · (6·25참전유공자 손자녀-남상혁, ’94년생) 공군병 복무만료 |
기념공연(1)은 일촉즉발의 전쟁터의 참상과 동료 장병들과의 전우애를 274일간 8만여 자로 기록한 ‘고 박순홍 하사의 6․25진중일기’와 그 아들인 박정래 시인이 아버지를 그리며 위대한 헌신에 감사하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소개한다.
편지 소개에 이어 어린이 합창단인 ‘리틀엔젤스 예술단’이 합창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한 6․25전쟁 당시 사용된 태극기 4종*과 대한민국이 찾아야 할 돌아오지 못한 12만 1,879명의 영웅을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끝까지 찾아야 할 121879태극기**’캠페인을 영상으로 집중 조명 한다.
기념공연(1)이 끝나면,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추진한 “제복의 영웅들” 사업으로 탄생한 새로운 제복을 한영섭 6·25참전유공자를 비롯한 대표 3분에게 입혀드리는 전수식을 진행한다.
세분의 6·25참전유공자는 종군기자, 유격대원, 여성의용군 신분으로 군인과 함께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해 용감하게 싸운 분들로 행사 현장에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할 예정이다.
기념공연(2)에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총 대신 삽을 들어 마침내 재건해낸 참전용사들의 ‘기적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영웅을 기억하는 나라’를 배우 박성웅님이 낭독하면 6·25전쟁에 참전한 22개 참전부대기와 참전유공자 대표 7명이 무대에 올라 강한 대한민국으로 지켜달라는 당부와 함께 대국민 거수경례로 참군인의 표상을 보여줄 예정이다.
끝으로 행사 참석자 전원이 함께 ‘6‧25의 노래’를 제창하며 행사가 마무리 된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호국영웅들의 위대한 헌신으로 자유를 지켰고, 오늘날 놀랍게 성장한 대한민국의 기반이 되었음을 정부는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할 것”이라며 “그분들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이를 미래세대가 이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AI가 설명하는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발생한 전쟁으로,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단순히 남북 간의 분단으로 인한 충돌이 아니라, 냉전 시대의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치적인 복잡성과 이념적인 갈등으로 인해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국제정치적인 장기간의 대립이었습니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48년에 설립되었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며 미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국가로 선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립된 두 개의 국가 간에는 서로 다른 이념과 정치체제, 경제체제, 사회구조 등이 존재하여 대립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을 침공하여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 공격은 북한이 통일을 추구하고 남한을 더 큰 군사적 통제 아래 두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침공에 대한 남한의 저항은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맞섰습니다. 이에 따라 전쟁은 북한과 남한 간의 국지적인 충돌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전쟁은 힘겨운 전쟁이었으며, 양측 모두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한 전쟁은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각국 간의 이해관계와 관여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북한을 지원하고 유엔군과의 전투에서 남한을 돕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미국과 중국 간의 군사적 대결은 전쟁의 규모와 기간을 연장시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양측은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전투를 중단하였습니다. 이로써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지만, 실질적인 평화 협정은 이루어지지 않아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단순한 국지적인 분쟁으로만 볼 수 없는 전쟁입니다. 이전에는 남북 간의 이념적 갈등과 국제정치적인 대립이 주요 시점으로 간주되었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전쟁의 본질적인 요인 중 하나로 한국 내에서의 사회적, 경제적인 갈등과 불평등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보다 포괄적인 시각을 제시해줍니다.
한국전쟁은 사회 경제적 갈등과 불평등의 측면에서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은 전쟁의 원인이자 전후의 상황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1. 사회적 갈등: 전쟁 이전의 한국은 식민지 시대와 일본의 지배,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파괴와 혼란으로 인해 사회적인 갈등과 분열이 심각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과 혁명 운동, 이념적 갈등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전쟁은 북한과 남한 사이의 이념적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극대화시키며, 각 진영 간의 사회적 구조와 가치관의 충돌을 격화시켰습니다.
2. 경제적 불평등: 전쟁 전후의 한국은 경제적인 불평등이 심각했습니다. 식민지 시대와 일본의 지배로 인해 한국의 경제는 주로 일본의 이익을 위해 개발되었으며, 그 결과로 지방적이고 불균형한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프라와 생산 시설이 파괴되었고, 경제적인 어려움과 빈곤이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이는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한국전쟁은 이러한 사회 경제적인 갈등과 불평등을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발발했고, 전쟁 그 자체로써 이러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악화시켰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인구 이동과 대량살상, 도시 파괴, 인프라 붕괴 등이 발생하였으며, 사회 경제적인 불평등은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었습니다. 이후 전쟁 종료 이후에도 남북 간의 경제 격차와 사회적인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한국의 발전과 현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