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의 약력과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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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1대와 12대 대통령을 지낸 독재자인 전두환의 약력과 일생을 살펴본다.

영화 "서울의 봄"의 개봉과 전두환 사망일에 즈음하여

 

약력(출처 백과사전 나무)

 

일생(출처 나무위키)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하였고,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1년 서울대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고, 이 일로 인해 박정희 소장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군에서 승승장구하였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되었다.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하였고, 이듬해 1980년엔 5.17 내란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이후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17 내란 쿠데타 관련 조선일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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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을 가리킨다. 1979년에 발생한 12.12 군사반란과 이어서 보면 6개월이나 걸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쿠데타의 일환으로서 진행되었다.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 사건을 5.17 내란이라고 지칭하고 이런 비정상적 상태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무력으로 짓밟은 사건이 5.18 민주화운동이다. 이러한 연관성을 까닭으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을 이 사건과 묶어서 "5.18 내란"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러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올랐다.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며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임기 말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고, 이후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으며, 이후 반란수괴죄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기면서 유력 후보 세 명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사면을 건의한 것을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이 수용하며 사면되었다.

퇴임 후 상당 기간 동안 건강을 유지하였으나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 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를 끝으로 사망하였다.

 


영화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 인터뷰
Q. 전두광과 그 무리의 모습을 보면 조직 폭력배가 연상된다. 이들이 진짜 군인보다는 폭력배 무리에 불과하다는 연출 의도가 있으셨는지 궁금하다.

그들이 조폭은 아니겠죠. 그 당시 엘리트들이고 훌륭한 나름대로 유능한 군인들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자기들 사리사욕을 위해 조직을 만든 다음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하기 위해 무엇이든 서습지 않으면 그건 조폭 아닐까요. (연출하면서) 조폭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쟁취하는 데 거침이 없으면 그게 그거 아닌가 싶어요.

전두환, 노태우가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1951년 한국전쟁 중 경남 창원군 진해읍에 육사가 개교되며 입학했다. 당시 가입교한 228명의 생도 중 경남 41명, 경북 29명 등 육사 인근 쪽 사람들이 다수이고, 기타 지역은 전북 27명을 제외하곤 10명 미만으로 이전의 군사영어학교 ~ 육사 10기에선 이북 출신이 다수인 것과는 인적 구성부터 차이가 크다. 직업으로 보자면 전쟁상황이라 현역과 군속 113명, 학생 97명, 공무원 4명, 기타 14명이다. 이들은 1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200명이 1952년 1월 20일 정식으로 입학한다.

이들 11기는 가입교 시절부터 출신 지역별로 뭉쳤는데, 추워서 모포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조차도 같은 지역끼리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같은 경북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박병하, 박갑용, 남중수 등이 몰려 다니고, 이후 손영길, 최성택 등 경남 쪽 생도까지 가세했다.

 

전두환은 국민학교를 4학년에야 시작했고 그것도 중간에 만주로 피신했다 오느라 2년 쉬는 바람에 공부가 부족하여 육사 입학시험부터 1차로 합격을 못하고 예비 후보로 겨우 입학했고, 우수 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 번도 못 해본 것은 물론, 졸업 성적이 상당히 떨어져 성적순으로 부여되는 군번을 낮게 부여받았다. 심지어 다른 멤버 박병하는 아예 성적 미달로 유급당했다.

그렇다고 어디 잘나가는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저 그런 친목 단체에 불과했다. 이런 문제로 사관생도 1~2학년 당시 전두환은 성적이 발목을 잡아 퇴교 위기에 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갑종간부후보생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육사 11기가 생도이던 시절에 이미 현역 장교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위상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 육사 11기는 자신들이 공부를 못 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로, 이후 육사 출신 후배 장교들 중 하나회의 회원을 고를 때 학업 성적을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 교육생들이 졸업할 때쯤인 1955년 4월 27일, 육군본부는 '참전용사들의 대우를 겸해서 과거에 입학했던 군인들에게 육사 1~10기를 부여한다'는 명령을 했다.

 육사 교수는 못되니 대신 ROTC를 장악할 야심에 서울대 교관으로 나가 있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두환은 다음날인 17일에 육사에 나타나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강영훈 육사 교장이나 동기생인 강재륜 교수등은 반대를 했지만, 쿠데타에 반대하던 교수들이 한명씩 끌려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18일에 육사 18기~21기 재학생들의 지지시위가 있었고 5.16 쿠데타를 결정적으로 성공시킨 사건으로 꼽힌다. 덕분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하나회는 다른 장교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급이 빨랐으며 하나회 내부에서조차도 전두환이 가장 빨랐다. 일단 전두환의 경우,소령 은 재직 기간이 1년 정도에 불과해 사실상 대위에서 바로 중령이 된 거나 다름 없었으며 1973년 고작 42살의 나이에 준장에 진급했다. 경력으로 따지자면 소위로 임관한 지 고작 23년 만에 장성급 장교가 된 것이며 이는 현직 준장보다 약 10년 정도 진급이 빠른 것이다. 게다가 1955년에 소위로 임관한 전두환 1950년에 임관한 장태완과 비교했을 때 1978년에는 둘이 동일한 소장이었다. 문제는 장태완은 명백히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것에 비해 전두환은 같은 기간 육사 생도로서 후방에서 학업에 전념했을 뿐이었는 점이다.

전두환의 군 경력들을 살펴보면, 1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적을 빼고는 제대로 된 전방부대에서의 근무 경력이 사실상 없다. 다른 하나회 핵심 멤버들도 비슷하다. 대부분 실전부대 근무는 서울 근교의 충정부대에서의 근무 경력뿐이다.

 

전방부대에서 다양한 훈련과 여러가지 상황을 직접 겪어봐야 경험이 쌓일 텐데 하나회 장교들은 이런 게 전혀 없었다. 후방 사령부에서 펜대만 굴리면서 야전부대 지휘에 관해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실전에 투입되니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베트남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면 1계급 진급과 무공훈장 수여가 관례였기에, 하나회 장교들은 뒤에서만 일하면서 자기 승진용으로 전쟁을 써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9사단 29연대장으로 베트남에서 1년을 근무한 전두환이 귀국하자, 훈장 심사에서 상관들이 직을 걸 수준으로 결사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야전에서 전두환의 실전 지휘는 심각하게 엉망이었고, 온갖 볼썽 사나운 행동을 계속하더니, 일선에서 싸우는 장병의 사기를 끊임없이 떨어뜨렸다는 것. 몇 가지가 당시 현장에서 사유로 지적되는데, 자신의 전과를 조작하기 위하여 암시장에서 베트콩 무기를 구입하여 상부에 전리품으로 보고하다가 직속 상관인 조천성에게 발각되었고, 부대의 식수가 부족해 병사들이 물을 찾는 상황에서 혼자만 온수 샤워를 즐기고 한가롭게 테니스를 치다가 병사들이 폭주하는 등, 부적절한 처신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결국 진급과 훈장 수여는 무산되었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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