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고도 공주의 상징이다, 공주의 특산물 밤으로 만든 밤빵이 유명하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웅진백제 (475~538)를 지킨 왕성입니다.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 산성이며,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 공주산성,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 인조가 이괄의 난(1624 년)을 피해 산성에 머문 이후 쌍수산성으로도 불렸습니다.
공산의 산세를 그대로 살려 성벽을 쌓아 전체적으로 들쭉날쭉한 외형이 특징이다.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서쪽문 금서루 말고도 성 곳곳에 크고 작은 정자들이 남아 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북문인 공북루 인근의 땅에 마을이 조성되었고, 이 마을은 '성안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 성안마을은 백제,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1997년까지 같은 곳에 있었으며, 마을은 이후 진행된 문화재 발굴 및 관광지 개발로 인해 사라졌다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한다.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이 함락되고 난 후 급하게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산세가 험하다.
석성은 대부분 조선시대 때 만들어졌지만 일부는 백제 초축 당시의 성벽도 확인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아예 토성으로 형성된 구간이 있기도 하다. 더군다나 공산성은 복원정비를 70~80년대에 이미 다 완료하였기 때문에 백제가 사용하였던 성벽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원래 백제시대에는 흙과 모래를 쌓아 건축한 판축식 건설로 만든 토성이었다. 일부 성벽을 절개한 조사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성의 남동쪽을 조사했다. 해당 조사에서는 토성이 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삼은 당시 사용하였던 성벽이고, 지금의 공산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축하면서 축소되어 남았다고 보았다.
빈(殯)이란 사람이 죽고 나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시신을 보존하면서 위령의례를 행하고 조문을 받는 것을 말한다. 임금의 빈은 정치적 이유까지 결부되어 1년, 혹은 2-3년씩 행하기도 하였다. 위령의례와 조문을 빙자하여 국가 내 각 세력들에게 충성서약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빈을 하는 동안 시신을 얼음으로 보존했다고 한다. 빈전(殯殿)은 빈을 위해 만든 전각을 뜻한다. 빈을 하는 기간이 연 단위라면 따로 전각을 지을 만하다.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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